美 ‘노근리 학살’ 조직적 은폐

미 국방부가 2001년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최종 조사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미군의 공식 지휘체계를 통한 발포명령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문건을 누락시키거나, 자료 가운데 발포사실을 적시하는 부분은 무시한 채 일부만을 발췌해 인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미 국방부가 노근리 양민학살을 ‘우발적 사건’으로 결론짓기 위해 발포명령 책임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또한 노근리 사건의 전면 재조사 요구와 미군의 책임 논란도 다시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4일 경향신문 취재진이 기밀해제된, 1950년 7월25~29일 사이 미군의 한국전쟁 관련 문건들과 미국의 최종보고서를 비교 분석한 결과 상부로부터 피란민에 대해 지상 또는 공중 총격을 지시한 사실이 담긴 명령의 상당수가 최종보고서에서 누락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의 최종보고서는 이번에 경향신문이 분석한 자료 등을 참조해 작성된 것이다.

미 국방부는 최종보고서에서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혼란상황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으로 결론내렸다.

미군 지도부로부터 하달된 총격 명령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당시 미군 지도부로부터 발포 명령이 수차례 내려졌음을 입증하는 문건들이 존재하고, 미 국방부가 이를 알면서도 무시하거나 미군에 유리하도록 ‘짜깁기’한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최종 조사보고서의 결론은 설득력을 잃게 됐다.

예컨대 미 제5공군 터너 로저스 대령이 1950년 7월25일 직속 상관인 팀버레이크 장군에게 보낸 ‘로저스 메모’를 보면 ‘제5공군은 미군에 접근하는 민간인을 공중공격하라는 육군의 요구에 지금까지 따랐다’고 돼 있다. 미국 최종보고서는 로저스 메모를 언급하고는 있지만 ‘지금까지 그 요구에 따랐다’는 핵심내용은 빠져 있다.

1950년 7월26일 미 제25보병사단의 킨 장군이 예하부대 지휘관에게 보낸 작전명령과 통신기록도 ‘사살(shot)’이란 말이 들어간 통신기록 대목만 누락시켰다.

노근리 인근의 용산리와 용암리 등에서 미 제35전폭대대 제8대대가 출격, 총격 임무를 수행했다는 임무수행보고서도 노근리라는 지명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미국 소식통은 “미국측 조사단을 지원한 역사학자 등이 참고 문건 가운데 발포명령 등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부분에 별표나 화살표 처리를 해 눈에 띄도록 했다”면서 “그런 내용들이 최종보고서에서 누락되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AP통신의 보도로 공개된 ‘존 무초 주한 미국대사의 서한’의 경우 미국측 조사단이 조사과정에서 무초 서한의 마이크로필름을 검토했는데도 최종보고서는 그 내용을 지적하지 않았다.

무초 서한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미국 관리가 본국으로 보낸 서한인 데다, 노근리 사건 바로 전날 열린 피란민대책회의 내용 가운데 총격지침 결정사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최종보고서에 담지 않은 것은 의도적 은폐시도로 볼 수밖에 없다.

정구도 노근리대책위원회 부위원장(광운대 교수)은 “미국 조사보고서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사실을 꿰맞춘 것”이라며 “지금부터라도 중립적인 기관이 전면적인 재조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유진·이호준기자〉